늙은 지아비의 노래
작성자 강상배
본문
사람들은 이곳을 추모 공원이라 부르고 나는 상복 파크뷰라 부른다. 상복 천이 흐르는 기슭에 2만 8천 위가 입주한 8층짜리 원룸형 임대아파트로, 어떤 동은 부부가 달리 입주해 투룸에 산다. 아파트 입구 헌화대에는 영전에 바쳐졌던 꽃다발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겹겹이 쌓여 있다. 카네이션은 오월에, 국화와 장미는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성탄절쯤이면 내 좋아하는 잎 붉은 포인세티아가 반갑다. 꽃다발 속에는 저희 걱정은 마시고, 부디 편안히 쉬세요, 보고 싶어요. 수놓듯 쓴 하늘로 보내는 편지가 눈물겨운 사연으로 가득하다.
정원이 넓은 이곳에 입주한 데는 자연사, 병사, 사고사, 고독사, 안락사, 자살도 있고 거기 억울한 죽음도 있다. 어둠이 내리고 인적이 끊기면 그제야 닫힌 문이 열리고 정원 정자 주변으로 삼삼오오 모여 술판, 바둑판, 화투판이 벌어진다. 할미 여럿은 둘러앉아 손주 자랑이 한창이고, 술 취한 늙은 홀아비는 젊은 작부에게 수작 부리다 혼쭐나기도 한다. 음주 운전으로 젊은 나이에 들어온 박씨는 저만치 비켜 권하는 술을 손사래 내친다.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몽환적인 밤 풍경이다.
아내가 잠든 공원은 나에게는 오를 수 없는 붉은 산 울룰루나 소도처럼 신성한 곳이다. 삶이 벅차 도망칠 때 숨겨주는 피난처요, 지쳐 주저앉았을 때 나를 안아 일으켜 주는 곳이다. 일에 쫓겨 찌든 모습으로 찾아와도 부끄럽지 않게 두 팔 벌려 반갑게 맞는다.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기다리는 곳이며, 만나서 헤어지고는 이내 보고 싶어 다시 오는 곳이다. 온종일 내 눈빛과 내 몸의 모든 감각은 공원으로 향하고, 공원 생활을 중심으로 나의 세상은 돌아간다. 아내를 하늘로 보낸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왔으니, 누가 보면 공원 생활자로 부를 만하다. 아침에는 모닝커피를 들고, 해거름이면 꽃을 들고 다시 오기도 한다. 여기만 오면 숨 쉴 수 있고 편안하니까.
가끔은 편안하지 않을 때도 있다. 장의 행렬 속 흰색 베옷을 입은 가여운 여인의 흐느낌은 차라리 땅을 치는 통곡보다 더 애절하게 애간장을 녹이고 끓이며 태운다. 아마도 살아생전에 어찌 해보지 못한 후회가 8할이고 나머지가 제 설움은 아닐는지. 장탄식과 울음이 잦아드니 다시 고요다. 좋아하던 백합을 안고 서둘러 2층 계단을 오른다. 두 딸아이가 연주하는 아베마리아를 알맞게 풀어 놓고는 캠핑 의자에 묻혀 지그시 눈을 감으니, 지나간 순간들이 명화극장 시작 필름처럼 스쳐 간다.
간밤에 보내온 손자들의 재롱을 보여주고 바깥으로 나오니 늦더위에 이은 뒤끝 더위가 끈질기다. 개울을 따라 난 오솔길은 인적이 드물어 한가로이 공원을 누리기에 좋다. 늘 고요하고, 여유롭고, 느슨하며, 평화롭다. 우련한 빛이 골짜기 사이로 흘러내린다. 몽테뉴는 ‘묘지가 내다보이는 창문이 있는 방에서 살라’고 권했는데 여길 두고 한 말 같다. 묘지가 주는 음습함을 화사한 풍경으로 절묘하게 바꿔 놓았다. 계절을 잊은 매미들의 합창을 들으며 조금 더 오르막길을 걷다 보면 야트막하고 평평한 바위가 엎드려 있다. 남몰래 울기에 알맞은 눈물 바위다. 매미울음과 내 울음이 섞이고 개울물과 내 눈물이 섞여 흐르고 있음을 어느 뉘가 알겠는가. 오솔길을 따라 비 온 뒤 깊이 흐르는 작은 폭포 곁에 다다르면 습관처럼 호주머니를 툴툴 턴다. 버리지 못해 쟁여왔던 욕심 찌꺼기, 걱정 나부랭이를 털고 나니 한결 가볍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햇볕도 들지 않는 후미진 곳에 버림받은 집단거주지 유택 동산이 있다. 족히 사오십 구가 넘는 나지막한 봉분에 오래된 유해들을 한 구에 250위를 뿌려놓은 산분장 터다. 효도하자며 납골당에 모시고는 기껏해야 30년을 돌볼 뿐, 후손들로부터 버림을 받아 여기에 뿌려진다. 버려지는 셈이다. 쓸쓸함이 내 안에 큰 무덤 하나를 만든다. 인생이 덧없는 것임을 여기 말고 다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묘지에서 화장으로 풍습이 바뀌고 얼마 되지 않았지만, 노인 인구 천만 명이 넘고, 인류가 탄생한 이후 1,170억 명이나 죽어 묘지도 납골당도 포화상태가 되고 보니 이를 해결할 산분 자연장은 어쩔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첫눈, 첫사랑, 첫걸음, 늘 처음은 가슴 떨리는 설렘이지만, 내 공원 생활의 처음은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 마지막까지 지켜내지 못한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 난 어떡하라고’ 하며 울부짖던 그 허망함이 고스란히 내 몫이 되었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세상이 멈춘 듯했다. 당장 현금지급기 사용도 낯설고, 골라주는 옷만 입고, 짧은 식성 탓에 따라다니며 밥 떠먹여 주던,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는가. 암만 생각해도 설거지, 분리수거 몇 번 거든 것 말고 떠오르는 게 없다. 그러면 살아라도 있으니, 죽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저승사자라도 찾아가 멱살 잡고 억울한 사연 한번 따져 물을까. 아니면 무릎 꿇고 제발 혼자 남은 내 딱한 처지를 봐서라도 되돌려달라고 애원이라도 해 볼까.
공원 생활자로 살아오며 늘 듣는 말이 좋은 곳으로 갔으니 괜히 붙잡지 말고 그냥 보내줘라. 라는 말이다. 맘 상하지 않게 집착이라는 말을 에둘러 말함이 분명하다. 하지만 나도 언젠가는 맞이할 죽음과 싸우려면 방패막이 하나쯤은 가져야 하지 않는가. 한순간 내 사랑을 앗아가고 이제 나마저 정조준하는 저 죽음의 정체를 온전히 밝혀낼 수 있다면, 그 방패막이로 집착이든 뭐든 다 끌어모아 싸워야겠다. 그리하여 억울한 죽음 뒤에 감춰진 비밀을 낱낱이 해체하여, 마침내 실오라기 하나 남김없이 발가벗겨 끝장을 봐야겠다. 이렇게 죽음에 싸움 걸어 피 터지게 싸운 일이 내 공원 생활의 전부다.
언젠가 나도 공원을 떠날 것이다. 그날은 끝없는 슬픔과 고독을 견뎌내고 당당히 홀로서는 날이길 바란다. 지금은 떠날 때 필요한 만큼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잊어버리진 못해도 살다 보면 또 다른 즐거움도 생겨 끝이 보이겠지, 했는데 오래오래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은 한 조각의 비늘로 점점 사라지는데 추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선명하게 남아 나를 붙든다.
슬기로운 공원 생활이 아니었던지 여전히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다만 공원 생활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삶은 끝나기에 의미 있다는 점이다. 만약 영원히 산다면 밤새워 글을 쓸 이유가 어디 있으며, 어느 누가 사랑에 목숨 걸고 불타는 사랑을 하겠는가. 일할 수 있고 내가 필요한 그 누구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으니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공원의 시간은 느릿느릿 간다. 추억이 오래 머물기 때문이다. 편안히 잠들었던 아내의 영면 때 모습을 떠올리며 이제 아프지 않은 곳에서 편안히 쉬고 있다 싶어 아깝고 애통한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진다. 죽음이 기다려 주고 있을 때, 잘 죽는 법을 깨우쳐야겠다. 불가에서도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알지 못하면 어떻게 살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철 이른 낙엽이 내리는 공원 가로수 길에, 더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줄 곳도 하나 없는 백발의 등 굽은 사내가 저만치 비틀대며 걸어가고 있다.
정원이 넓은 이곳에 입주한 데는 자연사, 병사, 사고사, 고독사, 안락사, 자살도 있고 거기 억울한 죽음도 있다. 어둠이 내리고 인적이 끊기면 그제야 닫힌 문이 열리고 정원 정자 주변으로 삼삼오오 모여 술판, 바둑판, 화투판이 벌어진다. 할미 여럿은 둘러앉아 손주 자랑이 한창이고, 술 취한 늙은 홀아비는 젊은 작부에게 수작 부리다 혼쭐나기도 한다. 음주 운전으로 젊은 나이에 들어온 박씨는 저만치 비켜 권하는 술을 손사래 내친다.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몽환적인 밤 풍경이다.
아내가 잠든 공원은 나에게는 오를 수 없는 붉은 산 울룰루나 소도처럼 신성한 곳이다. 삶이 벅차 도망칠 때 숨겨주는 피난처요, 지쳐 주저앉았을 때 나를 안아 일으켜 주는 곳이다. 일에 쫓겨 찌든 모습으로 찾아와도 부끄럽지 않게 두 팔 벌려 반갑게 맞는다.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기다리는 곳이며, 만나서 헤어지고는 이내 보고 싶어 다시 오는 곳이다. 온종일 내 눈빛과 내 몸의 모든 감각은 공원으로 향하고, 공원 생활을 중심으로 나의 세상은 돌아간다. 아내를 하늘로 보낸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왔으니, 누가 보면 공원 생활자로 부를 만하다. 아침에는 모닝커피를 들고, 해거름이면 꽃을 들고 다시 오기도 한다. 여기만 오면 숨 쉴 수 있고 편안하니까.
가끔은 편안하지 않을 때도 있다. 장의 행렬 속 흰색 베옷을 입은 가여운 여인의 흐느낌은 차라리 땅을 치는 통곡보다 더 애절하게 애간장을 녹이고 끓이며 태운다. 아마도 살아생전에 어찌 해보지 못한 후회가 8할이고 나머지가 제 설움은 아닐는지. 장탄식과 울음이 잦아드니 다시 고요다. 좋아하던 백합을 안고 서둘러 2층 계단을 오른다. 두 딸아이가 연주하는 아베마리아를 알맞게 풀어 놓고는 캠핑 의자에 묻혀 지그시 눈을 감으니, 지나간 순간들이 명화극장 시작 필름처럼 스쳐 간다.
간밤에 보내온 손자들의 재롱을 보여주고 바깥으로 나오니 늦더위에 이은 뒤끝 더위가 끈질기다. 개울을 따라 난 오솔길은 인적이 드물어 한가로이 공원을 누리기에 좋다. 늘 고요하고, 여유롭고, 느슨하며, 평화롭다. 우련한 빛이 골짜기 사이로 흘러내린다. 몽테뉴는 ‘묘지가 내다보이는 창문이 있는 방에서 살라’고 권했는데 여길 두고 한 말 같다. 묘지가 주는 음습함을 화사한 풍경으로 절묘하게 바꿔 놓았다. 계절을 잊은 매미들의 합창을 들으며 조금 더 오르막길을 걷다 보면 야트막하고 평평한 바위가 엎드려 있다. 남몰래 울기에 알맞은 눈물 바위다. 매미울음과 내 울음이 섞이고 개울물과 내 눈물이 섞여 흐르고 있음을 어느 뉘가 알겠는가. 오솔길을 따라 비 온 뒤 깊이 흐르는 작은 폭포 곁에 다다르면 습관처럼 호주머니를 툴툴 턴다. 버리지 못해 쟁여왔던 욕심 찌꺼기, 걱정 나부랭이를 털고 나니 한결 가볍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햇볕도 들지 않는 후미진 곳에 버림받은 집단거주지 유택 동산이 있다. 족히 사오십 구가 넘는 나지막한 봉분에 오래된 유해들을 한 구에 250위를 뿌려놓은 산분장 터다. 효도하자며 납골당에 모시고는 기껏해야 30년을 돌볼 뿐, 후손들로부터 버림을 받아 여기에 뿌려진다. 버려지는 셈이다. 쓸쓸함이 내 안에 큰 무덤 하나를 만든다. 인생이 덧없는 것임을 여기 말고 다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묘지에서 화장으로 풍습이 바뀌고 얼마 되지 않았지만, 노인 인구 천만 명이 넘고, 인류가 탄생한 이후 1,170억 명이나 죽어 묘지도 납골당도 포화상태가 되고 보니 이를 해결할 산분 자연장은 어쩔 수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첫눈, 첫사랑, 첫걸음, 늘 처음은 가슴 떨리는 설렘이지만, 내 공원 생활의 처음은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 마지막까지 지켜내지 못한 패배 의식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 난 어떡하라고’ 하며 울부짖던 그 허망함이 고스란히 내 몫이 되었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세상이 멈춘 듯했다. 당장 현금지급기 사용도 낯설고, 골라주는 옷만 입고, 짧은 식성 탓에 따라다니며 밥 떠먹여 주던,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는가. 암만 생각해도 설거지, 분리수거 몇 번 거든 것 말고 떠오르는 게 없다. 그러면 살아라도 있으니, 죽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저승사자라도 찾아가 멱살 잡고 억울한 사연 한번 따져 물을까. 아니면 무릎 꿇고 제발 혼자 남은 내 딱한 처지를 봐서라도 되돌려달라고 애원이라도 해 볼까.
공원 생활자로 살아오며 늘 듣는 말이 좋은 곳으로 갔으니 괜히 붙잡지 말고 그냥 보내줘라. 라는 말이다. 맘 상하지 않게 집착이라는 말을 에둘러 말함이 분명하다. 하지만 나도 언젠가는 맞이할 죽음과 싸우려면 방패막이 하나쯤은 가져야 하지 않는가. 한순간 내 사랑을 앗아가고 이제 나마저 정조준하는 저 죽음의 정체를 온전히 밝혀낼 수 있다면, 그 방패막이로 집착이든 뭐든 다 끌어모아 싸워야겠다. 그리하여 억울한 죽음 뒤에 감춰진 비밀을 낱낱이 해체하여, 마침내 실오라기 하나 남김없이 발가벗겨 끝장을 봐야겠다. 이렇게 죽음에 싸움 걸어 피 터지게 싸운 일이 내 공원 생활의 전부다.
언젠가 나도 공원을 떠날 것이다. 그날은 끝없는 슬픔과 고독을 견뎌내고 당당히 홀로서는 날이길 바란다. 지금은 떠날 때 필요한 만큼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잊어버리진 못해도 살다 보면 또 다른 즐거움도 생겨 끝이 보이겠지, 했는데 오래오래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은 한 조각의 비늘로 점점 사라지는데 추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선명하게 남아 나를 붙든다.
슬기로운 공원 생활이 아니었던지 여전히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다만 공원 생활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삶은 끝나기에 의미 있다는 점이다. 만약 영원히 산다면 밤새워 글을 쓸 이유가 어디 있으며, 어느 누가 사랑에 목숨 걸고 불타는 사랑을 하겠는가. 일할 수 있고 내가 필요한 그 누구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으니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공원의 시간은 느릿느릿 간다. 추억이 오래 머물기 때문이다. 편안히 잠들었던 아내의 영면 때 모습을 떠올리며 이제 아프지 않은 곳에서 편안히 쉬고 있다 싶어 아깝고 애통한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진다. 죽음이 기다려 주고 있을 때, 잘 죽는 법을 깨우쳐야겠다. 불가에서도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알지 못하면 어떻게 살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철 이른 낙엽이 내리는 공원 가로수 길에, 더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줄 곳도 하나 없는 백발의 등 굽은 사내가 저만치 비틀대며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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